내일을 위한 마을기록

2024. 2. 4. 23:02calico의 공부/글쓰기

 

인천 각 구에 있는 문화재단이나 문화원에서는 마을 또는 지역에 대한 조사와 기록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연수문화재단과 연수문화원은 시민기록가교육과 지역조사, 그리고 출간 사업을 하고 있다. 미추홀학산문화원에서는 미추홀시민아카이브를 구축해 나가고 있다. 기록 사업은 원래 박물관이나 연구기관에서 전문가들이 수행하던 것이다. 최근 들어 일반 시민들이 참여하고 만들어 가는 기록 사업이 증가하고 있다. 인천마을공동체만들기 지원센터에서도 시민 아카이브 학교, 우리 마을 조사기록사업 등을 펼치고 있다.

 

아카이브(archive)는 자료실, 문서보관소, 기록원 등으로 번역이 되는데, 인터넷을 통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디지털 아카이브가 많이 구축되고 있다. 미추홀학산문화원 홈페이지를 통해서 미추홀시민아카이브에 들어가면 미추홀구의 산업, 지리, 문화, 예술, 역사, 사람, 삶의 이야기 등에 대한 다채로운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미추홀학산문화원은 20221226지역문화 아카이브 포럼을 개최하고 시민 참여형 아카이빙 사업의 과정과 내용, 그리고 의미에 대해서 발표하고 토론하였다.

 

이 행사에는 학계 전문가 이외에도 시민기록가활동 사례 발표가 있었다. 미추홀학산문화원은 2021년부터 지역기록 활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을 모집, 교육하여 지역기록 사업에 참여시키고 있다. 시민기록가들은 정해진 주제와 지역에 대해 학습하고, 기록으로 남길 대상을 직접 만나 인터뷰하고 글을 쓰는 방법을 배운다. 여기서 인터뷰 또는 면접조사를 통해 글을 쓰는 작업을 구술사(oral history)라고도 부른다. 구술사는 시민기록가의 조사 방법이면서 동시에 시민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치는 수단이 된다. 구술사는 면담자와 구술자의 공동 작업이다.

 

https://www.archivecenter.net/MichuholCA

 

:미추홀시민아카이브

미추홀구의 지역문화 기록물들을 누구나 확인할 수 있는 디지털 아카이브입니다. 우리는 근, 현대를 중심으로 급격한 변화를 거치며, 사라지고 생겨나는 것들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카이

www.archivecenter.net

 

마을기록에는 다양한 주제와 형식이 포함된다. 학익동 재개발 지역의 옛 모습을 수집했던 곽은비 작가의 개인전 <학익동>과 같은 수집가적기록, 중구 적산가옥을 탐구한 건축가 이의중 외 저자들의 신흥동 일곱 주택과 같은 건축적 기록, 연수구 함박마을의 고려인 이야기를 담은 들꽃 같은 사람들과 같은 구술 기록, 사진작가 김보섭의 사진책 차이나타운, 인천 청관이나, 철거를 앞둔 둔촌주공아파트를 담은 라야 감독의 영화 <집의 시간들>와 같은 예술적 기록 등이 모두 마을기록이다.

 

그래서 이제 아카이브는 문서보관소가 아니다. 디지털 아카이브에는 문서뿐만 아니라 그림, 사진, 동영상이 모두 들어가 있다. 그래서 아카이브가 아니라 복합문화공간인 라키비움(larchiveum)’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라키비움은 도서관(library), 기록관(archives), 박물관(museum)의 기능이 한곳에 모여 있다는 의미로 만들어진 합성어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2020년 개관한 증평기록관을 들 수 있다. 증평기록관은 충청북도 증평군에서 행정기록과 민간기록을 모두 관할하는 방식으로 조성되어, 민간기록 부분은 주민들의 일상 삶에 대한 기록, ‘증평기록가양성 과정을 수료한 주민들이 직접 수집, 정리한 기록이 포함되어 있다.

 

https://larchiveum.net/

 

증평기록관 디지털 주제 아카이브

증평의 지금을 기록합니다. | 증평사람과 증평기록관이 힘을 합해 모은 기록이 꽃피는 증평에 초대합니다. | 충청북도 증평군 증평읍 광장로 88 증평군청 별관 1층

larchiveum.net

 

마을기록은 최근 박물관이나 역사학 관련 학술단체가 관심을 두고 있는 공공역사(公共歷史, public history)’ 논의와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공중(公衆, public)을 위한, 공중에 관한, 공중에 의한 역사라고 설명되는 공공역사는 미국이나 유럽의 박물관과 역사학계, 역사교육 기관 등을 중심으로 논의되고 실천되고 있는 분야이다. 즉 공동체의 역사와 정체성을 누가, 어떻게 구성하고 교육하는 것이 바람직한가에 대한 고민에서, 전통적인 국가 중심의 역사와 교육보다는 공공적 성격의 공중중심의 역사쓰기와 교육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이런 관점에서 마을기록은 지역사의 중요한 분야이며 마을기록가는 공공역사가로 평가된다.

 

마을기록의 종류와 형식이 다양하지만, 여전히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은 기록되지 않고 잊혀가고 있다. ‘마을은 면적과 거리로 환원되는 물리적인 개념만으로 설명될 수 없다. 마을은 사람과 사람의 다양한 관계, 즉 사회적 관계가 펼쳐지는 장소이다. 마을이 사라진다는 것은 그 관계도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마을기록이 재개발로 사라지는 지역에 대해 다루고 있다. 하지만 기록이 사라진 관계를 회복시키지는 못한다.

 

기록으로 재현된 마을은 한 폭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는다. 그러나 향수(鄕愁)로 마을을 재생시킬 수 있을까. 현실에서 영향력이 없는 마을기록은 활성화되기도 어렵다.  비용과 노력을 들여 아카이브를 구축한 기관 중에는 기록물의 활용도가 낮아 곤혹스러워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기록사업이 중심이 되는 학술기관이나 국가기관이 아니라면 기록 그 자체를 위한 사업을 하기는 어렵다. 마을기록은 마을이 유지되고 발전할 수 있는 구심점을 만들어 나가는 데에 보탬이 되어야 한다. 구축 못지않게 활용을 염두에 두고 사업을 수행해야 한다.

 

 

미추홀시민아카이브 "전세사기를 바라보는 시민기록 이야기"

 

 

 

예산과 제도와 기구를 모두 갖추고 있는 공공기관은 마을기록 사업을 체계적으로 수행 의무가 있다. 마을기록 사업은 민과 관이 협력하여 구축하는 아카이브가 될 수 있도록 일반 시민들의 참여 폭을 넓혀야 한다. 하지만 공공기관의 아카이브는 기관이 추진하는 사업을 홍보하거나 성과를 알리는 수단이기도 하다. 공공기관의 예산 지원으로 만들어지는 마을기록 사업에서는 시민기록가의 권한이 제한될 수밖에 없다.

 

마을기록은 마을을 살아가는 주민들의 삶이 담기는 공동체 자신 기록이 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미추홀시민아카이브가 다루기 민감한 이슈였던 전세 사기문제를 가지고 기록사업을 진행한 것은 큰 의미가 있다. 물론 시민들의 다양한 이야기와 견해가 자유롭게 펼쳐지기 위한 전제는 절제된 자율성이다. 시민들은 시민사회 영역 즉 마을공동체나 시민단체 활동 속에서 절제된 자율성을 학습하고 체화해 나가야 한다.

 

마을기록이 지방자치와 풀뿌리민주주의의 성숙을 위한 공론장이 될 수 있으려면 더  노력이 필요하다. 마을을 형성하기 위한 마을기록, 마을을 활성화하는 데 기여하는 마을기록, 쇠락한 마을의 재생을 고민하고 그 방향과 방법을 찾아가기 위한 마을기록, 갈등적이고 논쟁적인 다양한 주민들의 견해가 자유롭게 펼쳐지면서 지혜로운 해결책을 찾아가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마을기록이 필요하다.